#4: 부조리의 대물림이 아니라, 도리의 선순환으로.
"부조리의 대물림." 을 구글에 쳐보니 군대가 가장 많이 나온다. 나는 애초에 자신이 겪은 부조리를 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본인이 어린 시절에 이용을 당했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본인이 어른이 되었을 땐 같은 부조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사회생활을 해보니 부조리의 대물림이 일어나는 곳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맨날 나에게 자신이 여태까지 당한 부조리에 대해서 말했던 이가, 정작 나에게 같은 부조리를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 또한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 또는 나보다 동생인 사람들에게 형들에게 당했던 부조리를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게 아닐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혹시나, 내가 엄청나게 손가락질했던 사람과 같지는 않은지. 동생들을 정말로 아끼고, 동생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생들을 이용해먹고 수단으로 생각하는 형은 아닌지. 요즘엔 매일매일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며 내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내 인생에서 참 존경할만한 어른들도 많았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만났던 어른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훌륭한 어른이 되기 위해선 어떤 것들을 행해야하고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 내 지인들이 힘든 상황에 돕자.
우리집 형편이 갑자기 매우 좋지 않아져서 SAT(미국 대입시험) 학원도 갈 수 없었을 때 내가 서울에 집을 구할 수 있도록 월세를 지원해주고 학원비용을 지원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사촌형이었다. 큰 고모의 장남인 사촌형은, 나와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났는데, 사촌형은 월마다 부모님께 몇 백만원씩 지원해주셨고 덕분에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SAT 학원을 다녀볼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사촌형에게 "그 때 왜 그렇게 저를 도와주셨냐." 여쭤보니 사촌형은 나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사촌형이 사회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신 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그니까 아버지가 사촌형을 도와주셨고, 사촌형은 그것을 나에게 갚으신 것이다. 사촌형이 힘들 때 아버지가 도와주셔서 사촌형이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나 또한 사촌형이 나를 도와주신 것을 잊지 않고있다. 그래서 내가 a41을 하면서 미국에 1년간 갔을 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조카들(사촌형의 자식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컴퓨터도 사주고 그랬다. 내가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카들도 내 자식들에게 그런 사촌형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2. 택시에서 쥐어줬던 10만원이 아직도 생각난다.
정욱이형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 벌써 형을 알고 지낸지도 10년이 넘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면서 정치와 철학에 빠져있는 나를 보면서 "똑똑하다. 난놈이다." 칭찬을 해주면서도 항상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곤 하였다. 내가 딱 20살이 되던 겨울에 정욱이형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청담동에 있는 라운지바에 데려가서 가장 비싼 샴페인을 시켜주고 "돈있는 사람이 받는 대접"이 무엇인지를 경험시켜 주었다. 당시엔 내가 천안에 살고있을 때라 집에 내려가야 했었는데, 버스가 끊겨서 찜질방을 찾고 있었던 나에게 10만원을 쥐어주며 택시를 타고 천안으로 내려가라고 말해줬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내가 정욱이형 사업에 도움을 준적도 없고, 지금도 이 형이 하는 사업에 대해서 자그마한 도움 한 번 드린적이 없다. 그럼에도 항상 자신의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가장 아끼는 동생이자 가장 똑똑한 동생이다. 큰 인물 될 사람이다. 여기서 제일 대단한 사람이 될 친구다." 라고 나를 소개해주셨다.
내가 열심히 살았던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정욱이형에게 인정받고, 정욱이형과 같이 어울리고 싶었던 이유도 분명히 있었다. 정욱이형은 돈이 많았으니까 나도 최대한 그 눈높이에 맞춰보고 싶었다. 내 자신이 정욱이형과 그 무리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난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룰때마다 부모님 다음으로 정욱이형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했었던 거 같다. 사회에서 어찌보면 나의 가능성을 가장 처음으로 알아봐준 사람이기 때문에, 난 앞으로도 정욱이형에게 보여주고 증명할 것들(show and prove)이 산더미다. 내가 대기업에 취직했을 때, 정욱이형을 불러서 코스 요리를 사줬던 기억은 지금도 나에게 큰 성취로 다가온다.
나도 그래서 정욱이형처럼, 똑똑하고 욕심이 많은 동생들을 좋아한다.
3. 퇴사자에게 선물과 밥을 사주던 상무님과 현대 BS&C 임원분들.
내가 현대 BS&C에 있을 때, 아버지처럼 나를 챙겨주고 기업의 임원으로써 나에게 좋은 솔선수범을 보여주셨던 상무님이 기억난다. 상무님은 항상 회사에서 퇴사한 사람들에게 상품권을 주고, 맛있는 밥을 사주셨는데. 그 이유는 회사를 퇴사한 사람들도 나중에 어떻게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퇴사자들에게도 일종에 '블레싱'을 해주셨었다. 그리고 퇴사를 했더라도 간간히 연락을 하셔서 안부를 물어보시기도 하셨다. 내가 실수를 했었을 때도, 업무를 잘 처리 못했을 때도 나에게 일 하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주신 분이었다.
나와 같이 입사했던 성민씨와 나를 "천재"라고 불러주시며, 고졸임에도 대리 직급으로 입사했던 우리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대변해주시던 분이셨다. 내가 퇴사를 했을 때도 맛있는 밥을 사주시면서 누구보다 나의 미래를 응원해주신 분이셨다. 상무님 덕분에 관계에서 호의적인 선물이 주는 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1) 주변 사람이 힘들 때 돕고 2) 동생들에게 큰 동기부여를 해주고 3) 나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순간이라도 사람 자체를 보고 호의를 배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내가 삶을 살면서 나에게 크고작은 도움이 되었던 분들이 많다. 나에게 부조리를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 많기 때문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 부끄러운 어른, 부끄러운 형이 되지는 말자. 자신을 존경했던 사람이 등을 돌리는 것 만큼이나 큰 상실은 없다.